다리밟기

다리밟기


대보름 달빛이 맑아야만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풍년도 좋다마는 밝은 달빛 아래 억척스레 빌붙는 그림자를 따라서 하염없이 거니는 맛도 이 아니 좋을쏜가. 하지만, 자기 그림자를 따라가는 외로움을 즐기려고 다리를 밟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정월 대보름날 밤에 열두 다리를 밟고 지나가면, 그해 열두 달의 모든 액운을 면한다고 하고, 또한 그 한 해 동안 다리의 병을 앓지 않는다고 하여, 이날 밤에는 푸른 달빛 아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들 다리를 밟으며 다함없이 걸어다니는 것이다. 이 보행 놀이를 답교(踏橋) 즉 다리밟기라고 한다.

경도(京都=서울)에서는 성 안의 한복판을 흘러내리는 개천(開川=淸溪川)에 걸려 있는 대광통교(大廣通橋)를 중심으로 하여 차례로 열두 다리를 두루 돌아 밟는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인왕산(仁王山) 아래 백운동(白雲洞)에서 내린 물이 동남쪽으로 흐르는 줄기에 자수궁다리(慈壽宮橋), 금청교(禁淸橋), 송첨교(松簷橋)와 송기교(松橋)가 있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돌린 물줄기에는 모전다리[毛橋), 대광통교(大廣通橋), 장차골다리長橋=長倉橋=長橋), 수표다리(水標橋), 할교다리 (河良橋=河橋=經新橋), 새경다리(孝經橋=孝橋=永豊橋), 마전다리(馬廛橋=太平橋)가 있고, 이 개천이 흐르는 하류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을 지나 흥인지문(興仁之門=東大門)밖으로 영도교(永渡橋)와 살곶이 다리(箭串橋=濟盤橋)가 있다.

백악(白嶽) 아래 삼청동(三淸洞) 물줄기엔 북창교(北倉橋), 장원서교(掌苑署橋), 장생전교(長生殿橋), 십자각교(十字閣橋), 중학교(中學橋), 혜정교(惠政橋)가 있다.

북산(北山) 물줄기에는 금천교(禁川橋), 파자교(把子橋), 계생동(桂生洞) 일대의 물은 철물다리[鐵物橋=通雲橋), 창경궁(昌慶宮)뒤뜰의 옥류천(玉泉) 물엔 옥천교(玉川橋), 황교(黃橋), 이교(二橋=蓮池洞橋) 등이 있다.

남산(南山) 물줄기에는 수각교(水閣橋), 전도감교(錢都監橋), 소광통교(小廣通橋), 곡교(曲橋), 구리개다리(銅峴橋), 주자교(鑄字橋), 붓골다리(筆洞橋), 무침교(無沈橋), 청녕교(靑寧橋), 어청교(於靑橋) 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이 여러 다리 가운데서 궁궐 안에 있는 다리는 빼고라도, 일반 백성은 마음대로 열두 다리를 돌아가며 밟을 수가 있었다.

보름달이 뭉긋이 떠오를 즈음이면, 대광통교에는 다리를 밟는 사람들이 밀고 밀치고 우글우글 들끓는다. 다리밟기 첫 출발이 바로 대광통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대광통교는 성 안에서 그중 큰 다리였다. 다리를 밟는 사람들은 달이 지새도록 끊이지 않고 다리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다리밟기는 고려(高麗) 때부터 시작된 세시풍속으로서, 남녀가 쌍쌍이 짝을 지어 밤이 깊도록 다니므로, 거리가 혼잡하고 풍기가 문란해서 여자는 보름달 다리밟기를 금하기까지 했으며, 그래서 열엿샛날 밤에 따로 여자들만이 담교를 행하게 되었다고, 《지봉유설》은 기록하였다.

이렇듯 성행하던 다리밟기는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는데, 양반들은 상놈들과 섞여 다니기가 싫대서 하루 앞선 14일 밤에 행하였고, 이날을 흔히 '양반 다리밟기'라고 했으며, 부녀자들은 남정네들이 들끓는 14, 15일을 피하여 16일 밤에 다리밟기를 하다가 그나마 향기롭지 못한 일이 잦아서, 조선시대 중엽 이후로는 부녀자의 다리밟기는 차차 줄어들었다.

행인(杏仁) 이승만 화백의 《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에 보면 “내가 어린 시절에 본 기억으로는 보름날 밤에 입에 장죽의 담뱃대를 문 노인네와 아낙네들의 손잡이로 딸려나온 조무래기들이 한데 어울려 광중다리(廣通橋〕위를 오락가락하면서 서성대던 광경이 어렴풋이 눈안에 잡혀든다. 그 무렵 내가 어른들에게 듣기로는 보름날 밤에는 기생이 장구를 둘러메고 둥당거리면서 흥을 돋우는 가운데 보신각(普信閣)의 저녁 종소리를 듣고 한무리씩 떼가 져서 거리로 쏟아져나오는데, 이날 다리를 밟으면 일년 내내 다리에 병이 없고 열두 다리를 건너면 열두 달의 액땜이 된다고들 해서 행하는 우리네 풍속의 하나이다”라고 기술하였다.

다리밟기는 경도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도 성행하였는데, 특히 함경도 함흥(咸興)의 만세교(萬歲橋) 다리밟기는 유명했다. 만세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는 방법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달랐는데, 열두 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걸려 있는 다리를 모조리 건너야 되는 지방도 있고, 다리 셋을 건너면 되는 곳도 있으며, 어느 지방에서는 제일 큰 다리나 가장 오래된 다리를 자기의 나이 수대로 왕복하기도 한다.

<송파 답교놀이의 실태>(김명자, 《월간문화재》 1981년 10월)조사에 의하면, 송파(松坡) 돌마리 답교놀이는, 30여 명의 남녀로 구성된 놀이꾼들이 갖은 복색을 하고 답교놀이를 베푼다고 한다. 돌마리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석촌리(廣州郡中垈面石村里)였으나 1963년 1월 1일 서울시로 편입되어 현재는 송파구 석촌동으로서, 이 돌마리에는 다리가 없기 때문에 마을 앞길을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다리밟기를 대신하였는데, 답교놀이꾼들을 이웃 마을에서 초청하면 그곳에 가서 답교놀이를 해주기도 해서, 정월 초부터 보름 또는 정월 내내 행하였다고도 한다.

1936년에 조사 정리한 《조선의 향토오락》에는 송파 돌마리 답교놀이에 대해, “각자 옷을 차려입고 근처의 다리를 건너다닌다. 부인들은 음식물을 물에 던져 넣으며 복을 빌기도 한다. 이전에는 마을의 남자들이 어린이를 어깨에 태워서 무동춤을 추면서 농악대를 선두로 행진하다가, 다리 위나 그 부근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그러면 나온 사람들은 농악에 맞추어서 춤을 추며 밤이 새는 줄도 모른다. 또 술을 낸 마을 유지의 집을 찾아가서 마당에서 춤을 추며 놀기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리밟기 풍속은 중국에서도 행해져서, 《형초세시기(荊楚記)》,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 주교(走橋), 주백병(走百病)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전통스포츠인 다리밟기는 보행 운동으로서, 남녀노소가 다같이 즐겁게 행할 수 있는 대중적인 놀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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